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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펌] 고대 그리스 로마 건축양식

by 사우람 2010. 7. 12.
참고 사이트: http://dragon.seowon.ac.kr/~jeronimo/landeskunde/europe.html

고대 그리스 로마 건축양식

고대 야외극장, 오데온, 스타디온, 아레나

그리스 시대는 오케스트라가 중심
##########0*지중해 세계의 각지에는 야외극장이 많이 남아 있다. 대개는 세 방향이 비탈로 되어 있는 지형을 이용하였고 낮은 곳은 인공적으로 돌을 쌓아 올려서 주발 모양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리스 시대의 야외극장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오케스트라라고 불리는 원형의 무대로서 그 중앙에 연극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제단을 둘러싸고 노래하고 춤추며 다니는 합창대 (코러스)가 무대의 중심을 이루었다. 오케스트라 주위에는 반원형보다 훨씬 ㄷ 각도가 큰 관객석이 있고 그 맨 앞줄에는 신관이나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폴리스의 관리와 심사위원들의 특별석이 있었다.

프로스케니온과 스케네의 역할
오케스트라 뒤에는 프로스케니온이라 부리는 작은 장방형의 무대가 있었고 그 뒤에 스케네라고 불리는 작은 적벽이 있었다. 이 스케네 scene말이 영어인 scene의 어원이다.
그리스 시대의 스케네는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뒤편을 막지 않아서 오케스트라를 돋보이게 한 동시에 출연자가 그 배후에서 의상을 갈아입거나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실 역할도 했다. 프로스케니온은 아주 작아서 오케스트라에 대하여 보조적인 역할밖에 갖지 못했다. 주무대는 어디까지나 오케스트라였다.

연극은 디오니소스 신에 대한 제사였다
고대 그리스 극은 신에 대한 하나의 의식이었으며 폴리스의 공적인 행사였다. 그래서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극의 연출과 연기에 대해서는 콩쿠르가 행해졌다. 그대 그리스의 뛰어난 비극이나 희극이 오늘날까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 극은 폴리스의 공식행사였으므로 전시민이 참가해야 하는 것을 되어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큰 폴리스에서는 항상 그렇다고 볼 수 없지만 원칙적으로는 전원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가난한 시민도 참가할 수 있게끔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의상이나 연습에 필요한 비용은 부유한 시민이 기부하는 것이 관례였다.
합창대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오로지 신을 위한 의식이었을 때부터 그렇게 전통처럼 되어 있었다. 그후의 로마 시대와는 달리 중심에 제단이 있는 원형 오케스트라를 설치하였던 것도 역시 극이 신을 위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는 가로로 긴 무대가 출현
##########1*로마인은 그리스인의 흉내를 내어 야외극장을 만들었지만 그 외형은 그리스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먼저 프로스케니온은 넓게 옆으로 길어졌는데 오늘날의 극장 무대와 같은 모양이 되었다. 스케네 역시 크고 호화로워졌다. 반대로 오케스트라는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해서 반원형으로 되었다. 옆으로 긴 무대로 되었기 때문에 반원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양식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극에 대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구경거리라면 화려한 편이 낫다
로마인에게 극은 오락을 위한 구경거리였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옛날에는 배우란 천한 직업으로 여겨왔었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황제 네로가 배우처럼 무대에 나왔다가 비난받은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그리스 인이 극을 폴리스의 신을 위한 의식으로 생각해서 전 시민이 참가하도록 하고 노예나 외국인에게 출연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점은 스포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인에게 스포츠는 시민 스스로가 행하는 것이었고, 극 경기는 신을 위한 의식이었으므로 노예나 비 그리스인의 출장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로마인에게 스포츠는 좋은 구경거리여서 노예들을 훈련시켜 위험한 전차경주 등을 시킴으로써 그 스릴을 즐겼다.
또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리스 시대에는 없었던 무대막이나 대도구를 쓰게 되었다. 무대 양쪽 부분이 아주 길었던 것은 그곳에서 대도구를 조립해 두었다가 굴대에 실어 무대 중앙으로 밀어내어 장면을 빨리 바꿀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시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건축물들
##########2*(왼쪽 사진은 에페소스의 야외극장)
그리스 본토나 각 식민지에 많이 있던 야외극장은 로마 시대가 되자 모두 로마식으로 개조되고 말았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남쪽 기슭에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은 고대 그리스의 연극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역할을 했지만 역시 로마시대에는 개조되었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오케스트라가 원형이고 그 중심에 제단이 있었던 흔적을 뚜력하게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 시대의 모습 그대로 완벽에 가깝게 남아 있는 귀중한 예는 아테네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이르는 당일 코스 여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피다우로스 야외극장이다. 그 음향효과의 훌륭함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노래를 부르는 회관"이 오데온
야외극장과 비슷한 고대건조물로 음악당 (odeon), 경기장 (stadion), 원형투기장 (arena)이 있다. 이 건조물들은 마당을 둘러싼 듯이 하여 계단상의 관객석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는 사람에 따라서 파괴가 심한 유적의 경우에는 혼동될 수도 있지만 물론 각각 다른 구조와 용도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음악당은 야외극장과 비슷하지만 규모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또한 야외극장과는 달리 지붕이 있었다.  물론 현재의 유적에는 지붕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다.
오데온의 오데 (옛날형은 oidei)는 가창이라는 뜻으로 영어의 ode와 어원이 같다.

단거리 경주에서 비롯된 스타디온
그대 그리스 인은 운동경기를 매우 중시했는데 기본적인 경기이자 인기가 높았던 경기는 200미터가 채 안되는 단거리 경주였다. 이 경기를 위해 직선 코스를 설치하고 출발선, 최종선, 관람석 등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스타디온의 효시였다.
차츰 장거리 경주, 경마, 전차 경주 등이 도입됨에 따라 스타디온은 폭이 넓어지고 중아에 분리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래 직선 코스여던 때부터의 전통이 이어져서 고대의 경기장은 그 전과같이 길죽한 U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점이 현대의 경기장과 가장 다른 점이다. 이런 모양으로 전차 경기를 하면 코너를 돌을 때마다 심하게 부딪히는 일이 생겼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을 생각해보면 쉽다.

로마시대에 탄생한 원형경기장
원형경기장의 대표적인 것은 물론 로마의 콜로세움이다. 원형경기장은 아레나 (라틴어로 "모래"라는 뜻)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운동장에 모래를 깔았기 때문이다.야외극장, 오데온, 스타디온은 그리스 인이 창시하고 로마 인이 계승하였지만 원형경기장은 로마 인이 만든 것이다.
원형경기장의 바탕은 스타디온의 형태였다. U자형 경기장의 둥글게 되어 있는 끝을 두 개 합해서 만들어진 타원형의 건조물이 원형경기장의 효시였다.
그리스 시대에도 볼거리는 있었지만 그것은 들판이나 광장 한 쪽에서 행해졌다. 흥행을 위한 특별한 시설을 만드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헬레니즘 시대가 되자 야외극장이나 스타디온이 신에 대한 의식을 위한 장소라는 감각이 엷어졌다. 그 결과 수용 능력이 큰 관객석이 있는 장점을 이용하여 그곳에서 관객의 인기를 끌 수 있는 경기가 시작되었고 로마 시대에 와서 점점 흥행하게 되었다.
원형경기장에서의 메인 이벤트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검투사의 목숨을 건 승부, 검투사와 맹수의 대결이었다. 로마인의 선배인 에트루리아인이 포로에게 목숨을 건 승부를 시켜서 신에 대해 봉납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을 로마인이 구경거리화시킨 것이 이런 흥행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스토아

그리스의 스토아는 단순하게 길쭉한 주랑으로 뒤에는 벽, 앞은 광장에 면해 개방되어 있었다. 스토아는 후에 공공 건축의 유적이나 교회건축의 원점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생활은 아고라(광장)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거래를 했다.
그러한 광장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스토아이다. 스토아는 한편으로 광장을 장식하는 효과를 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면에서 시민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아무리 그리스 인이 광장을 좋아했다고 하더라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거나 비가 올 때에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눌 장소로는 지붕과 주랑이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 없다.
아테네의 아고라에는  크고 작은 몇 개의 스토아가 있었다. 그 가운데 제우스 에레우테리오스의 스토아는 소크라테스가 매일 찾아와서 철학을 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주춧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고라의 동쪽을 끊어서 옛날대로 복원되어 현존하고 있는 것이 아타로스 스토아이다. 기원전 2세기에 소아시의 페르가몬 왕이자 아테네의 찬미자였던 아타로스가 기증한 것이다. 길이 116미터, 폭은 20미터이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의 장대한 주랑들이 각각 이중으로 즐비하게 서 있다. 그 안은 21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는데, 당대에는 유명상점들이 몰려 있었다. 현재는 아고라 박물관으로 갖가지 출토품이 전시되고 있다.

아테네의 아고라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바실레우스 스토아가 있다. 오늘날에는 주춧돌만이 반쯤 남아 있다. 바실레우스는 황제란 뜻으로 이 스토아는 집무장소로 쓰였다. 바실리케 (basilice) 라고도 불리는 이 건축물은 기둥의 수가 8개밖에 안되는 간소한 주랑이었지만 아테네 시민이 최고의 경의를 표한 관공서였다. 페르시아 전쟁 때 파괴되었지만 그후에 원형 그대로의 간소한 모양으로 재건되었다.

바실리카

그리스 관공서로 쓰였던 바실리케는 라틴어로 바실리카 (basilica)라고 한다. 물론 아테네와 로마는 나라의 제도나 풍습이 다르므로 명칭은 같아도 실질적으로는 다른 것이 되었다.
로마 영내 각지의 도시에서 만들어진 바실리카는 처음에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一자형이었지만, 로마인은 그 양 날개를 접어서 ㄷ 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폼페이의 바실리카는 ㄷ 자형인 채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다음에 로마인은 ㄷ 자형 안뜰에 지붕을 덮었다. 보통 지붕으로는 안이 어두워지므로 높직한 지붕을 얹고 창문을 냈다. 이것으로 로마형의 바실리카 양식은 완벽한 것이 되었다. 그후 수백년 동안 바실리카 양식은 유럽의 공공건축 특히 교회건축의 기본형으로 존속했다.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뿐 아니라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성당도 로마시대에 비롯된 바실리카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로마 영내 각지에 만들어진 바실리카는 본래의 목적이 재판이었지만 그밖에도 연설회나 갖가지 행사에 이용되었다. 때로는 특산물을 전시하는 시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공영 견본시장이었던 셈이다.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때는 시민에게 개방되어 사적인 상거래나 환담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다목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므로 큰 도시에는 바실리카가 두세 개 정도 있는 것이 편했다.

바실리카의 구조 : 신랑 (네이브, nave), 측랑 (아일, aisle), 3랑식, 5랑식

중세 유럽 건축 양식

아치, 돔, 볼트

석조 건축의 역사를 바꾼 아치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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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인류는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려 많은 장대한 구조물을 쌓았는데 그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 아치였다. 아치의 원리는 쐐기이다. 쐐기형의 돌을 반원형으로 놓으면 돌은 서로 밀어내느라고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위에서부터 무게가 걸리면 밀어내는 힘이 더욱 긴밀해져서 오히려 강도를 더해 간다. 위의 무게는 아치 맨 끝에 집약되어 있어서 가느다란 기둥으로도 받칠 수 있다. 나무나 돌로 된 기둥은 가로나 비스듬한 방향에서 힘이 가해지면 부러지기 쉽지만 위로부터 수직으로 힘이 걸리면 아주 강해진다.
유럽이나 이슬람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중세의 묵직한 석조건축이 아치의 열로 받쳐지고 그 아치가 다시 아주 가느다란 기중으로 받쳐지고 있어서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보기에도 아치와 가느다란 돌기둥의 열은 매우 아름답다.

아치가 돔과 볼트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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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의 변천사                                                                            리브볼트

① 아치를 둥글게 회전시키면 돔 (dom, 궁륭)이 된다.
② 아치를 길게 옆으로 연장시키면 원통볼트 (barrel vault, 반원통 볼트, 터널 볼트)가 된다.
③ 원통 볼트를 십자로 교차시키면 (원통)교차볼트 (cross vault)가 된다.
④ 원통 볼트에서 변형되어 단면이 뾰족 아치로 된 볼트를 첨두 볼트 (pointed vault, 포인트 볼트)라고 한다.
어느 것이나 쐐기의 원리로 위로부터의 무게를 받치는 힘이 강한 점은 아치와 같다.

##########7*아치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비롯되었다
아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발명되어 지중해 세계로 퍼져 페르시아 건축을 통해 유럽 건축에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는 옛부터 전해지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건축법이 다리 등에 이용되어 아치식 돌다리가 남아 있다.
관광여행에서 자주 들르는 곳으로 중앙 아메리카의 마야 문명 유적, 서남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동남 아시아에 걸쳐서 분포되어 있는 오래된 힌두교 사원이나 불교의 석조 사원 건물 등이 아치식 건물이다.
아치를 모르면 상인방식이나 까치발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전자는 길고 무거운 돌을 필요로 하며, 후자는 많은 돌을 쌓아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받치려면 출입구 경우에도 돌을 튼튼하게 쌓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치처럼 경쾌한 기둥의 열로 받칠 수는 없다.
기독교의 대성당이나 이슬람교의 큰 모스크 안에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 보면 건축 공간이 넓직하고 천정이 굉장히 높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돌로 되어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것을 간으케 해주는 기법이 바로 아치, 돔, 볼트이다.

초기 교회의 양식

이교의 신전을 기독교의 교회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기독교가 공인되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을 교리로 하는 가톨릭이 성립된 이후, 테오도시우스는 마침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게 되었다. 그는 391년과 392년 사이에 일련의 칙령을 공포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임을 선언하고 모든 이교의식을 금지하였다. 이리하여 기독교는 약 3세기 반 동안에 로마를 정복하는데 성공한 셈이었다. 로마는 문화적으로 그리스에 의해 정복당하였으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에 의해 정복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이제 박해받는 종교에서 박해하는 종교로 180도 선회하기 시작했다. 이교 신전의 대부분은 국가에 의해 강제 접수되어 기독교의 교회로 바뀌었다. 로마시대 도시의 경우 현재 기독교의 대성당이 세워져 있는 장소에 예전에는 그리스 로마 계의 신들의 신전이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장소에는 로마의 최고신 쥬피터의 신전이 있었다.
이처럼 이교의 신전을 접수하는 것은 기독교 측에서는 이중적으로 효과적이었다. 첫째 기독교의 위상을 높이고, 둘째 그리스 로마 계의 신전들은 대개 도시의 중심에 서 있었으므로 교회가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입지 조건에서 매우 유리했다.

##########8*교회의 건축양식
그러나 이교의 신전은 신상을 안치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 건물이었으므로 기독교처럼 신자의 집회 성격이 강한 종교의식에는 구조적으로 부적합했다. 그래서 많은 신전들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교회가 새로 세워지는 예가 많았다. 이교 신전이 그대로 교회로 개조되어 남아 있는 예는 아주 드물다. 새로 교회를 신축할 때 모범이 된 것이 로마제국의 전통적인 집회장소이던 바실리카였다. 한 사람의 사회자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집회를 가진다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의 교회가 원하고 있던 기능은 바실리카의 그것과 흡사했다.
동방의 그리스 정교권을 제외한 서방의 로마 가톨릭권에서 교회의 건축 양식은 시대순으로 바실리카식, 로마네스크식, 고딕식, 르네상스식, 바로크식으로 변천해 왔다.
초기의 교회는 본래부터 있던 바실리카 양식을 본뜬 것이었는데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위대한 성모 마리아)와 "성곽 밖의 산 파우로" 교회는 그 좋은 예이다. 전자는 5세기, 후자는 4세기의 건축물로서 모두 후세에 증축되거나 개축되긴 했지만 당초의 바실리카식 기본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왼쪽 그림은 성 바울 바실리카)


성곽 밖의 산 파우로 교회

이 교회는 로마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공항을 왕래할 때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 정면 외벽을 버스 안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애석하게도 큰 화재를 만나 1823년에 재건되었지만 4세기의 창건 당시 바실리카 양식을 그대로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다. 신랑 양측에 20개의 돌기둥이 정연하게 들어섰고 신랑과 제1 측랑, 제2 측랑으로 나뉘는 전형적인 5랑식 바실리카이다.

교회 안뜰에 설치된 아토리움
건축 역사상 성곽 밖의 산 파우로 교회가 특히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은 본당이 바실리카 양식의 전형을 전하고 있는 것 이외에 본당 앞에 아토리움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아토리움은 주랑으로 둘러싸인 장방형의 앞뜰로 초기의 큰 교회에는 모두 아토리움이 붙어 있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
아토리움은 폼페이 유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원래는 로마인의 저택에 붙어 있던 앞뜰이나 안뜰이다. 기독교가 공인되었을 때 신자들의 예배를 위한 회당을 급히 마련하기 위해 부유한 신자로부터 기증받은 대저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교회와 아토리움이 인연을 맺게 된 효시라고 여겨진다.
초기의 교회는 공공의 집회장소인 바실리카 양식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대저택에 으레 있게 마련이었던 아토리움의 양식을 택한 것이다. 예배 전후에 성직자나 신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하는 데 아토리움은 아주 좋은 건축 공간이었다.

나르텍스를 설치하고 문을 이중으로
교회가 시내에 많이 세워지게 되자 아토리움은 건축에서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시내이므로 용지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배에 사용되는 공간을 되도록 넓히기 위해 예배에 직접 관계가 없는 아토리움은 생략되었던 것이다. 또 아토리움이 없으면 교회의 정면 외벽이 직접 통로에 면하게 되므로 길가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신성한 이미지를 한층  강하게 주는 효과도 있었다.
그와 함께 정면의 문을 열고 안에까지 그냥 들어가게 되면 예배 분위기가 깨질 우려가 있었으므로 큰 교회에서는 나르텍스 (전당)를 설치해서 문을 이중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비록 나르텍스가 없더라도 문을 이중으로 하는 방법을 연구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조)

일반 교회와 카테드랄
교회는 카테드랄(Kathedral)과 일반교회로 나뉜다. 카테드랄은 대주교가 재임하고 있는 격이 높은 교회이다. 그래서 카테드랄은 대주교좌 성당으로 불리기도 한다. 카테드랄의 경우 바실리카의 아프스 (가장 안쪽에 반원형으로 삐져 나와 있는 부분)에 대주교좌를 두었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가면 맨 안쪽인 아프스에 창문이 있고 성현의 상징으로 빛을 발하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그 밑에 유난히 호화로운 의자가 있는데 이것이 로마 대주교 즉 로마 교황의 지위를 상징하는 대주교좌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대주교좌가 있는 교회를 두오모 (duomo)라 부르거나 카테드랄레 (cattedrole)라 부르며, 독일에서는 돔(Dom)이라고 하거나 (Muenster)라고 부른다. 뮌스터는 라틴어로 수도원을 뜻하는 모나스테리움 (monasterium)에서 유래하며, 그 교회가 본래는 수도원에 부속된 성당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포르투갈에서는 대주교좌가 놓여 있는 교회를 세(se)라고 한다.

큰 대주교구의 넓이는 우리의 道 정도의 넓이며 대주교는 그 전체를 관할하면서 광장한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본거지인 카테드랄의 건축에는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자 역시 힘껏 협조하는 것이 상례였다.

비잔틴 양식

비잔틴 양식의 교회
##########9*
비잔틴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 정교가 융합된 뒤 오리엔트 요소가 가미되어 이루어졌다.
비잔틴 교회 건축은 4세기 중반경 동로마제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긴 바실리카식 평면을 채용하였다. 그러다가 5세기경부터 바실리카식 성당의 중심부에 돔을 설치하는 집중식 바실리카 성당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돔은 원래 집중식 건축형태에 적합한 구조여서 바실리카 건축과는 모순되는 데가 많다. 그래서 7세기경부터 보다 안정된 구조가 고안되었다. 이것은 정사각형의 중앙에 돔을 올리고, 이것을 전후좌우로부터 십자형으로 교차되는 반원통 볼트(vault)로 받치고 십자가의 네 끝에 작은 돔을 두어 교묘하게 균형을 잡는 형식이다. 그리스 십자식 성당의 명칭은 이 네 개의 반원통 볼트와 지벽이 그리스 십자형의 평면도를 만들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9세기 이후 비잔틴식 교회 건축은 그리스 십자형의 성당형식이 정형이 된다.

##########10*그리스 십자형 성당
(왼쪽 그림은 그리스십자형 성당 평면도)
성당 건축의 상징성은 십자가를 본뜬 평면 설계에서도 보인다. 바실리카에서는 제실 앞쪽의 한 구획이 좌우로 뻗어 익랑을 형성하고, 라틴 십자가를 묘사한 것이 보이며 (이것은 유럽에서 특히 현저하다), 집중식에서는 사방에 같은 길이의 가지를 뻗게 하여 그리스 십자가를 본뜬 것이 통례이다. 바실리카식이 비잔틴 중기 이후 차차 쇠퇴한 데 비하여 집중식은 그리스 십자형의 설계를 고집하면서 여러 유형을 발달시켜 나갔다.

비잔틴 교회의 그리스 십자형 평면은 중앙 집중적인 방사상 평면으로, 동방 교회에서 강조하는 위계적인 우주관과 잘 들어 맞았으며, 이러한 우주관은 건축적·회화적 표현 방식을 두루 융합하여 성당의 돔·벽·천장 등에 꾸며 놓은 프레스코나 모자이크와 같은 교회 장식의 도상(圖像) 체계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중앙 돔의 꼭대기에는 준엄한 모습의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분)라고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 아래쪽에는 천사의 모습을, 그리고 벽에는 성인들과 예언자들의 모습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성모 마리아는 대개 4개의 날개부를 덮는 반쪽 돔 중 높은 곳의 일부에 그려졌다. 빛은 이러한 성스러운 돔에서 발생하여 그 아래의 집중화된 공간으로 퍼진다. 동양적인 요소인 돔을 고전적인 열주식에 혼용시킨 비잔틴 성당은 돔을 연속된 벽으로 지지시킨 것이 아니라 4각형 평면 위에 펜덴티브를 사용하여 지지하였다. 이탈리아 북부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 베니치아의 산 마르크 성당,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 등이 대표적인 비잔틴 양식의 교회 건축이다.


##########11*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비잔틴의 교회건축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제 고대풍의 장려한 원주열도, 널찍한 공간도 없으며, 두꺼운 벽체로 구획된 당내는 돔의 높은 창에서 채광이 되는 형식이다. 아르메니아의 교회건축은 6∼11세기에 이르는 동안 매우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그 특징은 돔을 이고 선 집중형식으로서 종류도 많고 변화도 풍부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사각형 가운데서 그리스 십자형을 보이는 고전적 형식은 중기 이후 비잔틴 교회형식의 정형이 되었다. 

 


##########12*산 마르코 대성당

 
명의 상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성 마르코 유골의 납골당으로 세워진 것(829~832)이다. 그 후 성 마르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1세기 말에 현재의 산 마르코 성당이 재건되었는데 이 재건공사에 롬바르디아의 건축가와 석공이 상부구조 건축에 참가했다. 산마르코성당의 건축양식은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십자형(十字形)의 바실리카로 다섯 개의 동방적인 돔을 받치고 있으며, 파꽃형의 아치와 고딕풍의 천개(天蓋)가 이어진 정면(파사드)을 가지고 있고 아름다운 대리석 건축으로 황금빛의 배경을 지닌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코노스타시스와 이콘
##########13*정교의 교회는 어둡고 구리나 은으로 만든 훌륭한 등불이 늘어져 있다. 회중석 정면에는 목조와 석조의 칸막이가 있고 제단은 그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칸막이 안쪽은 성직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역이다. 이 칸막이를 이코노스타시스 (성화벽)라고 하며, 거기에는 크고 작은 이콘이 여러 장 걸려 있다. 이콘은 그리스도, 성모, 성인 등을 판에 그린 성화를 가리킨다.
그리스 정교의 교회에는 입체적인 우상이 전혀 없다. 이콘, 벽화, 모자이크와 같은 평면적인 도상 (圖像)뿐이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와 다른 점이다. 서유럽 교회 중에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등을 상기하면 비교가 된다.

가톨릭 문화권과 정교 문화권
우리가 한 마디로 동구라고 부르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북부가 가톨릭 문화권, 유고슬라비아 중남부,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정교 문화권이다. 좁은 의미의 동구에 들어가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그리스와 러시아가 정교문화권의 중요 멤버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가톨릭 문화권과 정교 문화권에서는 단지 종교와 관련된 건축 양식뿐만 아니라 미술 공예에서도 그리고 문화의 심층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중세와 근세에 걸쳐 문화의 전달자와 담당자가 주로 성직자였으므로 종교의 차이가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가톨릭 문화권에 비하면 정교 문화권은 정치적으로 불운했다. 중심이어야 할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교도인 아랍인과 터키인에게 영토를 잠식당하다가 1453년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후 정교권에서 독립국으로 남은 것은 러시아뿐이었다. 한편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인문주의, 종교개혁, 자연과학 사상의 발흥 등이 시작되었고 서구사회에 격변이 일어났다. 유럽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가 금방 떠올리는 이미지는 실은 가톨릭 문화권의 그것이다. 서유럽의 가톨릭 문화권이 비잔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유럽문화는 서고동저 (西高東低) 현상으로 발전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

관광명소가 생기지 않았던 중세 전반
서유럽에서 관광명소로 되어 있는 건축물은 대개 5세기 이전의 것이거나 11세기 이후의 것이다. 6-10세기의 건축물은 거의 없다. 민족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분리 후 서유럽은 분열과 정체시대에 접어들어 후세의 관광명소가 될 만한 건축물이 생길 수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서 서유럽의 대부분을 통일한 카알 대제의 프랑크 왕국이다. 카롤링거 왕조의 건축물은 극소수이긴 하지만 독일이나 프랑스에 현존하고 있고 관광명소로 되어 있다. 독일의 아헨에 있는 카알 대제의 성당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경제부흥이 가져다 준 건축 붐
10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정세가 달라졌다. 우선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고 사회전반에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수공업이나 원격지 상업이 부활하여 도시가 흥하기 시작했다. 제후들 사이에 전쟁이나 결혼정책의 결과 영지의 합병이 진행되고 대형 제후들이 나타났다. 프랑스나 영국에서는 국왕이 큰 권력을 잡을 소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러한 에너지의 축적이 10세기 말부터 고대 건축에 대한 일대 붐을 불러 일으켰다. 거듭되는 토지 기증으로 재력을 쌓아가고 있던 각지의 수도원이 먼저 대규모의 증개축을 시작했다. 이어서 서유럽 각국에서는 도시가 경쟁적으로 고대 말기나 중세 초기부터 세워졌던 보잘 것 없는 교회를 부수고 최신 유행의 양식으로 크고 새로운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당시는 기독교의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의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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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텡 성당            제 2차 클뤼니 성당 

피사 성당, 투스카니 지방, 북이탈리아, 1063∼1118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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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                                    내부단면                            평면

로마네스크라는 용어는 19세기에
이와 같이 10세기 말에 일어나 11-12세기에 걸쳐 서유럽 전역에 유행한 새로운 건축 양식이 로마네스크이다. 이 유행은 프랑스에서는 12세기 중엽까지, 다른 지역에서는 13세기 경까지 계속되다가 그 다음에 고딕 양식으로 이어진다.
"로마네스크"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후세의 일이다. 영어를 통해 우리에게 들어온 로마네스크란 "로마풍의"라는 뜻이다. 11-12세기에 유행했던 건축물에서는 로마시대 건축물의 특징이었던 머리가 둥근 아치나 원통 볼트가 구사되었으며 또한 전체적으로 로마풍의 중후한 취향이 있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색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색은 11세기 초엽까지 목조였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네이브의 천장을 석조볼트로 바꾼 점에 있다. 목조천장도 라인란트 등지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석조볼트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이유는 신의 집으로서 불연성의 항구적인 건물이 바람직하였을 뿐 아니라 석재공간으로서의 통일성이 생기고 또 음향적인 효과를 높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석조볼트는 절단면이 원칙적으로 반원 아치이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창문이나 입구기둥 사이의 들보 사이나 처마 밑부분에도 이 반원 아치를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건축을 반원 아치의 집합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눈에 로마네스크라고 알 수 있는 블라인드 아치의 열
##########19*로마네스크의 외관상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은 외벽의 장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블라인드 아치 (후진)이다. 블라인드 아치가 있으면 그 교회는 로마네스크 식이라고 단정해도 틀리지 않는다. (왼쪽 그림은 독일 밤베르크 성당, 로마네스크 양식)
로마네스크 양식은 서유럽 각지에서 지역별로 특색 있는 발전을 이룩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내에서도 오베르뉴 로마네스크, 랑그도크 로마네스크 등은 모두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영국에서는 로마네스크라고 하는 대신 노르만 양식이라고 한다. 1066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후 강건한 노르망디의 로마네스크식이 널리 잉글랜드 각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역별로 특징이 있었지만 블라인드 아치의 열이 외벽의 장식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작은 블라인드 아치를 나열하는 방식은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 지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롬바르디 대 (帶)라고도 한다.

구조의 주역은 중후한 벽체와 둥근 아치
누가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블라인드 아치의 열은 로마네스크식을 분간하는 간단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부수적인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네스크식의 본질을 전체 구조에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 구조의 주역을 이루고 이루고 있는 것은 첫째 중후한 벽, 둘째 둥근 아치, 셋째 원통 볼트와 (원통)교차 볼트이다.
로마네스크식 구조는 우선 3랑식 바실리카 전부를 교차볼트로 덮는 방향으로 진행 되었다. 그리고 창건 당시 목조 천장이던 것을 화재에 대한 보강을 목적으로 바실리카에 볼트를 덮기 시작했다. 이때 2개의 원통 볼트를 직각으로 교차시킨 교차 볼트로 횡압력을 네 지점으로 분산시켰다. 교차 볼트는 후에 리브만으로 지지되며 그 사이에 경량의 석판을 메워 만든 리브 볼트로 발전된다.

로마네스크는 차츰 발전해서 다음의 고딕으로 이행하게 되지만 전성기의 고딕과 비교하면 로마네스크 구조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로마네스크에서는 중후한 벽과 기둥이 건물을 받치고 있지만, 전성기의 고딕에서는 벽은 사라져 버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벽이 차지하는 면적이 극도로 작아지고) 건물 밖으로 밀어낸 버트레스 (buttress)라고 하는 기둥으로 건물을 받치게 하였다. 벽이 사라진 자리에 전체적으로 넓고 높은 창이 만들어졌고 스테인드 글라스를 끼워 매우 화려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그에 반해 로마네스크에서는 실내가 우두침침하고 묵직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위쪽으로 작은 창이 높직하게 나 있을 뿐 이어서 빛은 그곳으로만 스며든다.
로마네스크식의 교회는 전체적으로 보아 키가 낮고 납작한 편이며 내외 곳곳에는 둥근 아치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12세기 후반이 되자 둥근 아치는 변형되어 끝이 뾰족한 아치가 되고 다른 기술혁신과 섞여서 교회는 비약적으로 높직하게 되었다. 그것이 고딕양식이다. 이와 같이 로마네스크는 점진적으로 고딕식으로 옮겨갔는데 그 중간 형태의 것도 많이 남아 있다.

6개의 탑이 즐비한 독일 로마네스크
독일에서는 고딕식으로 이행하기 전에 로마네스크식이 독일의 개성을 가지면서 고도의 발전을 이룩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신랑에 대하여 하나의 수랑이 교차하여 십자 모양 (†) 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독일 로마네스크식의 교회 특히 대규모의 대주교좌 성당에서는 신랑의 앞과 뒤에 두 개의 수랑이 있고, 전체는 쌍십자형 (‡) 도는 공자 형 (工)을 하고 있다.
아프스도 대개 신랑 양쪽 끝에 있고, 한편에는 주제단, 다른 편에는 부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신랑과 두 개의 수랑의 교차점에 또한 각 수랑의 양끝에 6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어 장관을 이룬다.

고딕 양식

관광명소로서 압도적으로 많은 고딕
현재 관광명소로 되어 있는 건축물의 수로 보면 고딕 쪽이 로마네스크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그것은 교회나 수도원뿐 아니라 왕후의 성, 중제도시의 독립과 위엄을 과시하는 관청 건물, 부유한 시민의 저택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고딕식은 로마네스크식이 하늘을 향해 뻗어남으로써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기술적인 요인은 머리쪽이 뾰족한 첨두 아치, 리브 볼트, 버트레스의 세 가지이다. 이것들은 모두 로마네스크식 후기에 이미 싹이 텄지만 고딕식으로 되어 최고도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원두 아치로는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난점
로마네스크식에서는 원두 아치를 썼지만 이것으로 장대하고 복잡한 구조의 건물을 지으려면 기술적인 난점이 두 가지 있었다.첫째는 기둥의 간격이 다르면 아치의 높이도 달라져야 하는 점이다. 고대 건축은 평면 설계가 단순 명료했으므로 모든 기둥을 같은 간격으로 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중세의 교회 건축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둘째는 넓고 높은 건축 공간을 만들려면 아치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않을 수 없는데 그렇게 되면 버티는 힘이 약해져서 무너질 위험이 생긴다.
로마네스크와 마찬가지로 원두 아치의 원리를 사용한 돔에서 폭이 너무 넓었기 때문에 붕괴한 실례는 하나 둘이 아니다. 관광 코스로 유명한 이스탄블의 아야 소피아와 사마르칸트의 비비 하누인 모스크가 그런 예이다. 아야 소피아는 설계를 다시 해서 재건되었지만 비비 하누인은 붕괴된 채로 있다.
폭을 넓게 하더라도 그에 따른 석재도 크게 하면 되겠지만 이번에는 돔 전체의 중량이 굉장히 커져서 그것을 받치는 기둥이나 횡압력이 문제가 되어 매우 어렵다.

첨두 아치와 리브 (rib)로 첫 번째 문제를 해결

##########20*
 첨두형 아치

이상의 두 가지 난점은 첨두 아치를 사용함으로써 동시에 해결되었다. 특히 폭이 넓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높은 아치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의 길을 열었다.
다음 문제는 첨두 볼트를 교차시킴에 있어서 그 교선 (交線, 이것 역시 곡선)을 구하는 일이었다. 중세인의 수학에서는 이러한 곡면이 마주치면 어떤 교선이 되는 가는 계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목조의 받침대를 만들어 놓은 뒤 먼저 볼트의 곡면이 부딪히는 선을 따라 리브를 만들고 그 다음에 볼트의 곡면을 돌로 쌓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이 리브 볼트이다.

증대한 횡압력은 어떻게 막는가
이렇게 해서 비약적으로 큼직한 볼트를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지만 그렇게 되면 두려운 것이 횡압력, 즉 높은 곳에 있는 많은 돌의 무게가 건물 벽을 바깥 쪽으로 밀어서 쓰러뜨리려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로마네스크에서는 창이 작고 수도 적을 뿐 아니라 벽이 낮고 중후해서 건물 전체가 튼튼하게 받치고 있었다. 그런데 고딕식에서는 벽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되었다. 더구나 창의 폭이 아주 넓고 수도 많아져서 그만큼 벽의 면적이 줄어들어 점점 더 횡압력에 견딜 힘이 약해졌다. 고딕 건축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하나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구사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위해서 창은 넓고 높고 많이 내는 것이 지상명령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키가 크고 창이 많은 석조건물을 안심하고 지을 수는 없었다.

플라잉 버트레스
##########21*약한 벽에 엄청난 횡압역을 견디는 힘을 주고 창의 면적을 줄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벽 밖의 벽면에 수직으로 돌로 만든 지주 (버팀기둥)를 만들면 해결되는데 그것이 바로 버트레스 (부벽)이다.
처음에 버트레스는 벽에 밀착된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벽에서 떨어져 바깥에서 공중에 호를 그리는 듯한 모양으로 석조 지주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것이 플라잉 버트레스 (공중 부벽)이다. 구조상 플라잉 버트레스는 바깥 쪽에서 벽에 기댄 듯한 모양으로 횡압력을 지탱하고 있다.
전성기의 고디 대성당, 예를 들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5세기말 가톨릭이 국교로 지정되면서 성당을 만들었으며, 1163년 개축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갖춰졌다.) 을 옆에서 보면 플라잉 버트레스가 마치 바구니처럼 외벽을 받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트르담 성당은 샤르트르 성당, 아미앵 성당, 랭스 성당 등과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22*
플라잉 버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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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면                     횡단면                               주 출입구 측면
노트르담 드 파리 성당, 1163∼1250년경

고딕 건축 제1호인 산 드니 성당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비약하는 불길을 당긴 것은 산 드니 수도원의 원장인 쉬젤이다. 고딕식 건축 제1호로 불리는 1137년에 이 수도원의 성당을 개축했을 때 생겨났다. 산 드니 성당은 파리 북쪽에 있고 오늘날에는 지하철로 성당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쉬젤은 스테인드 글라스에 대단하나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성자의 상이나 성서의 장면 등이 아름다운 색채를 띤 모습으로 떠오르면서 영묘한 오색의 빛이 당내에 가득차는 광경은 신의 집인 성당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첨두 아치, 리브 볼트, 버트레스를 구사하여 성당을 비약적으로 높게 함과 동시에 창을 보다 넓고 높게 낼 수 있는 고딕식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쉬젤이 새로운 양식을 시작하자 그것은 먼저 프랑스 국왕령 각지의 교회 건축에 채택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봉건제가 강고해서 대제후의 영지는 각각 독립국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상스, 상리스, 파리, 샤르트르, 랭스, 나미앵 등 초기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성당은 모두 북부 프랑스의 국왕령에 집중되어 있다.
이 점은 로마네스크식이 지방의 수도원에서 비롯된 것과는 크게 다른다. 로마네스크 초기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성당은 그 대부분이 대도시에서 멀리 덜어진 작은 읍이나 마을에 있다.
건축에 새로운 경향을 주입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고딕식의 훌륭함은 이윽고 각지의 수도원장, 건축가 등의 주목을 끌었고, 국왕령의 경계를 넘어 프랑스 전 지역에 파급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독일, 프랑스, 영국, 북부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퍼져갔다.
단 이탈리아 중부 이남은 최후가지 고딕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미술사가는 "고대 로마 이래 건축양식의 전통이 강하게 안아 있었기 때문에", 혹은 "남부의 강한 햇빛 아래서는 생기발랄한 건축 공간이 잘 어울리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어수선한 고딕식은 발을 들여놓을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하고 있다.

"고딕"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고트족에서
고딕식이 서유럽 거의 전역을 제패한지 300여년이 지난 후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근대 로마 이래의 전통"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반격에 나서 자신들이 창출해낸 르네상스식으로 전 서유럽을 다시 제패하기에 이른다. 이때 과거의 건축양식을 매도하는 말로서 이탈리아의 건축가가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고딕"이라는 용어였다. 그 이전에는 쉬젤이 창시한 새로운 양식에 이렇다 할 명칭이 없었던 것이다.
"북방의 야만인 고트족의 양식"으로 비하된 악평으로부터 고딕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것이다. 그것도 이해할 만한 것이 고대 말기에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바로 고트족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고딕이라는 말은 욕도 아닐뿐더러 한 시대의 양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정착하여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후기 고딕 양식

##########24*독일만이 가진 고딕 특유의 양식
후기 고딕은 각국별로 각각 특징 있는 발전을 이룩하였다. 독일에서는 거대한 첨탑을 쌓는 일에 열을 올렸다. 프랑스에서는 전적으로 성당 내부의 건축 공간에서 추구되었던 앙고성이 독일에서는 성당 안 뿐 아니라 밖의 첨탑에까지 추구되었다. 프랑스의 대성당에도 탑은 있지만 그 높이나 모양은 뒤늦게 만들기 시작한 독일 쪽이 더 철저했다. 유명한 쾰른의 대성당이 그 좋은 예이다.
쾰른의 대성당은 좌우로 2개의 첨탑이 솟아 있는 고전적인 쌍탑식이다. 그런데 탑의 앙고성을 높이려는 목적이 추진된 결과 독일 특유의 단탑식이 생겨났다. 중앙에 탑 하나만이 솟는 양식이다. 관광여행에서 자주 가는 곳은 뉘른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성모교회가 좋은 예이다. 이 교회는 규모가 작아서 단탑식이라고는 하지만 별로 높지 않다.
단탑식의 챔피언은 도나우 강변에 있는 옛도시 울름의 대성당이다. 보통탑이 2개 있는 것 외에 단탑식의 대첨탑이 문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그  높이는 161미터로 고딕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그것을 돌만으로 쌓아 올린 집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독일 후기 고딕에서는 할렌키르히 ( Hallenkirch)라는 양식이 출연했다. 영어로는 홀 처치 (Hall Church)라고 한다. 신랑과 측랑의 경계가 없게 하여 양자가 일체가 된 회당으로, 설교를 중시하는 독일 성직자들의 바람에서 탄생했다.

영국 고딕의 수직양식
영국에 들어간 고딕은 "초기 영국양식에서 장식 양식으로, 장식양식에서 수직 양식으로"라는 세 단계를 거쳐서 발달했다 그 중에서 영국 고딕식으로 가장 특징 있는 것이 수직 양식이다. 이 양식의 대성당을 밖에서 보면 모든 부분에서 수직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극히 특징적인 것은 창틀의 패턴으로 전면의 창을 보면 장지형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링컨, 솔즈베리 같은 영국이 자랑하는 고딕식 대성당은 한결같이 수직양식이다. 수직의 선과 거기에 직교하는 수평의 전의 정연한 교차를 강조하는 경향은 단지 창틀만이 아니라 축의 바깥쪽 전반에 걸쳐 있다. 영국의 대성당이 단정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수직양식의 두 번째로 큰 특징은 덧기둥과 리브의 선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서 우산을 폈을 때처럼 화려하게 천장에서 교차하는 모습이다. 이것이야 말로 영국 후기 고딕의정화라고 할 만하다. 아름다운 우산 모양의 선은 그것이 돌을 쌓아올린 것이라는 잊을 만큼 가볍고 화려하게 공중에서 춤추고 있다.

스페인 고딕 이사벨 양식
스페인에서는 고딕이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15세기부터 16세기 초에 걸쳐 특징 있는 양식이 태어났는데, 그 당시의 여왕인 이사벨라의 이름을 따서 이사벨 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라나다를 공격해서 무어인을 국내에서 쫓아내고 콜럼부스로 하여금 신대륙을 발견하게 하는 등 영명한 여왕 밑에서 카스티아드 왕국은 번영의 길로 치달았다. 이사벨 양식은 시대의 취향을 반영한 양식이다. 세부 장식에는 개성이 있고 레이스를 연상시키는 듯한 정밀한 돌조각 속에 갖가지 문장, 상상 동물, 식물, 꽃덩굴 등이 배치되어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바야그리의 산 그레고리오의 코레히오는 이사벨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이다.

포르투갈 고딕의 마뉴엘 양식
포르투갈에선도 15-16세기에 걸쳐 특이한 후기 고딕 양식이 발달했다. 당시의 국왕 마뉴엘 1세의 이름을 따서 마뉴엘 양식이라 불리고 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하고 포르투갈이 해외에서 큰 발전을 하기 시작할 무렵의 시대정신을 나타내어 세부적인 장식의 소재로서 배와 항해 용구, 진귀한 열대의 동식물 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굵은 로프를 꼰 듯한 돌기둥의 조각도 그 특징의 하나이다. 전체적으로 화려함이 넘치고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으로는 리스본의 산 제로니모 수도원이 마뉴엘 양식의 걸작품이다. 이밖에도 교회, 수도원, 성채, 귀족의 궁전, 대저택, 성주의 성 등에서 일반시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이 양식을 쓰고 있다.

근세 건축 양식

르네상스 양식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을 의미하는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을 의미한다. 14 ~ 16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학문, 예술, 사상 등의 새로운 문화 운동으로 이 시기를 르네상스 시대라 부른다.  처음 르네상스가 시작된  곳은 이탈리아이며 이어서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축 분야에서 일어난 유행의 변화
고딕식이 로마네스크식의 발전형태로서 태어난 것에 대하여 다음에 나타난 르네상스식은 고딕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에서 태어났다. 13세기에 북부 프랑스에서 태어난 고딕식이 서유럽 전역에서 크게 유행했을 때도 이탈리아의 중부 이남에서는 완강하게 고딕식을 거부하고 15세기에 접어들자 다른 건축양식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이 르네상스식이었다. 이 양식은 16세기에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고딕식을 순식간에 구시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브루넬레스키의 획기적인 건축이 전환점
##########25*건축 분야에서 르네상스의 불길을 당긴 것은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이다. 그는 로마로 가서 고대 건축을 연구하고 합리성, 명쾌성, 간소함 속에 질서정연한 균형을 지키고 있는 고대 건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피렌체의 "꽃의 대성당"에 돔을 만드는 설계가 공모되었을 때 브루넬레스키는 획기적으로 참신한 안을 내어 입선했다.
르네상스는 시대의 큰 흐름이었다. 브루넬레스키가 이 돔 하나를 만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그것으로 건축에 르네상스 양식이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합리적이고 명쾌한 건축공간을 탐구
고딕의 이념은 "합리성, 명쾌함, 간소함"과는 정반대이다. 자질구레한 장식이 붙어 있을 뿐 아니라 돌의 무게를 느끼지 않도록 하면서 환상적인 높은 건축공간을 연출하려고 온갖 기교를 다 부렸다.

##########26*르네상스의 이념은 "가장 합리적인 건축공간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점에 있다. 장식이 많은 고딕식의 첨두 아치 대신 고대 건축과 같은 단순 명쾌한 정원 아치와 직선이 존중되기에 이르렀다. 끝이 둥근 아치 중에서 기하학적으로 정확한 반원이 되어 있는 것을 특히 정원 아치라고 하며 르네상스식의 특징의 하나로 되고 있다.

세속건축으로 환영받은 합리성
알프스 이북에서 르네상스식은 맨 먼저 왕후 귀족의 성이나 관료 저택의 건축에 받아들여졌다. 재료와 품만 많이 들고 어두침침하고 좁은 방밖에 되지 않는 고딕식이 싫증이 난 것이다. 원래 인간이 살기 위한 건축공간은 밝고 쾌적해야 좋게끔 되어 있다. 같은 재료라면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구축하여 건물을 짓는 편이 낫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르네상스식이 일찍이 영주의 저택으로 채택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르네상스식 건축에는 정원 아치와 직선의 정연한 배열이 눈에 띈다. 한 시대 전의 고딕식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바깥 쪽에 지나친 장식이 없고 고작해야 조각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을 정도이고, 창이나 입구가 아치와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그 궁전은 르네상스식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 없다.

돔은 교회의 양식을 식별하는 힌트
##########27*교회 건축에 있어서 큰 돔이 있는 교회를 르네상스식이라든가 그 발전 형태인 바로크식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돔은 멀리서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으므로 건축양식을 식별하는 좋은 징표가 된다. 이탈리아만은 예외여서 로마네스크식이나 고딕식의 교회에도 돔이 있는 예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의 돔은 그다지 크지 않다.
물론 건축의 구성원리로서 정원 아치와 직선이 존중되고 있는 점은 교회도 영주의 저택이나 관공서 같은 세속건축과 같아서 이런 점으로 르네상스식인지 어떤지를 식별할 수 있다. (왼쪽 그림은 로마 산 피에트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단정한 것이 싫증나자 다음에는 바로크식으로
르네상스식의 연장선상으로 발달한 바로크식의 특징과 비교해보면 르네상스식의 특징을 더 잘 알 수 있다.
바로크 (Baroque)의 어원은 포르투갈어의 "일그러진 진주 (Barocca)"라는 뜻이다. 르네상스식의 "정연하고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에 싫증이 났을 때 "일부러 조화를 흐뜨려뜨려 격렬한 움직임을 나타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적인 면을 느끼게 하자"고 해서 출현한 것이 바로크식이다.
바로크식은 17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생겨나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 갔는데 18세기 후반이 되자 프랑스에서는 바로크식을 멀리하게 되었다. "바로크식은 너무 수선스럽고 악취미여서 품위가 없다. 좀더 우아한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프랑스에서 주류를 이루게 되어 클래식 양식이 생겨났다. 미에 대한 유행도 백년 단위 정도로 늘 변천해 가는 것이다.

바로크 양식

트레비 분수
바로크는 회화, 조각, 건축 등 조형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일제히 일어난 풍조였다. 그 특징을 알려면 실례를 보는 것이 가장 좋다.
##########28*왼쪽 그림은 로마의 트레비 분수이다. 조각의 주제는 해마가 이끄는 조개 껍질 전차를 타고 해신 넵튠이 건물 안에서 막 달려나온 장면이다. 해신의 동작은 일부러 좌우 균형이 맞지 않게 함으로써 생동감을 표현하고 있다. 해마도 해마의 재갈을 잡고 고동을 불고 있는 트리톤 (넵튠의 아들로 하반신이 물고기)도 좌우가 흐트러져 있다.
분수 자체도 르네상스 시대라면 정원과 직선을 써서 반 듯하게 만들었겠지만 여기서는 불규칙한 곡면만 쓰고 좌우의 대칭은커녕 몸부림치는 듯한 격렬한 동적인 느낌을 분수 전면에 걸쳐서 자아내고 있다.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 돌들도 마찬가지이다.
조각군과 배경물이 일체가 되어 융합해 버리는 것도 바로크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르네상스식이나 그 후에 나타난 클래식 양식에서는 설사 조상이 건물에 붙여진 경우에도 별도로 독립되어 있었다.

호화로운 종교건축
궁전과 같은 세속 건축물이라면 "과연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구나" 하고 감탄할 만 하지만 종교 건축이라면 아무래도 동양인에게는 납득이 각지 않는 듯 하다. 지나치게 요란스럽고 장식이 과다한 느낌이 들어서 종교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종교 건축에 관한 한 로마네스크의 소박한 느낌, 고딕의 장엄한 느낌이나 르네상스의 단정한 느낌 쪽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현존하는 교회, 궁정예배당, 수도원 같은 종교건축을 양식별로 분류하면 바로크식이 숫적으로 가장 많다.

바로크 건축을 한눈에 식별하려면
어떤 건물이 바로크식인가를 한눈에 분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불규칙한 곡선이나 곡면을 과용하거나 일정한 "형태의 연속성"을 일부러 끊어서 다른 선으로 바꾸거나 했다면 그 건물은 바로크식이라 생각해도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단 르네상스식에서 바로크식으로의 이행은 점진적으로 행해졌으므로 과도적인 형태는 얼마든지 있다. 바로크식에서 클래식 양식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독일에서는 바로크식 말기에 로코코식을 가미한 형태가 나타났다.

바로크의 막을 연 산 카르리노
##########29*왼쪽 사진은 산 카르리노 아레 쿠아트로 폰타네 (4개의 샘에 면해 있는 성 카를로)라는 긴 이름을 가진 교회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산 카르리노" (귀여운 성 카를로)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장소는 발베리니 광장에서 동남 쪽의 언덕을 올라간 곳에 있다. 네 모퉁이에 각각 춘하추동을 나타내는 샘이 있으므로 "4개의 샘"이라고도 불린다.
이 교회는 바로크식의 개막을 알리는 귀중한 존재로 미술사 책에는 반드시 사진과 함께 나온다. 바로크식의 창시자 중에 한 사람인 볼로미니 작으로 내부는 1649년에, 정면 외부는 1667년에 완성되었다.
정면 외부는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움직이는 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층은 중앙이 볼록 모양으로, 좌우가 오목 모양의 곡면을 이루고 있고, 위층은 세 면 모두 오목 모양의 곡면이지만 중앙에 타원통 형의 밖으로 난 창과 난간이 볼록 모양으로 삐쳐 나와 와 있다. 그 위에 붙어 있는 타원형의 메달도 일부러 크게 해서 불안정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상하 2층 사이에는 특히 두툼한 선을 넣어서 상하의 관련성을 일부러 끊어 버리고 있다. 정면 외부의 방 끝도 끊겨서 공중에 뜬 채로 있다. 종루도 마찬가지로 상반되는 곡면과 되받아내기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로마를 정복한 바로크식
정원과 직선의 짜임새에 의한 차분한 양식밖에 몰랐던 세상 사람들은 이 교회를 보고 깜짝 놀라 찬반이 엇갈려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보수파는 이 교회의 양식을 "미친 짓"이라 했고,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혁신파는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별로 기발한 디자인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참으로 미증유의 것이었다. 별과는 눈사태처럼 혁신파의 승리로 끝이 났다. 본래는 보수적이어야 할 교황, 고위성직자, 귀족들도 이제는 이 새로운 취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교회, 궁전, 저택으로부터 길거리의 분수조각에 이르기까지 바로크식이 아니면 통하지를 않았다. 나보나 광장의 "4대하의 샘"도 그렇지만 로마에는 의외로 바로크의 기념물이 많다.

로코코 양식

저택이나 궁전건축에서 비롯된 로코코
로코코식이 유행한 것은 연대적으로 1710년부터 1770년까지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173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로코코 시대에 들어섰다는 주장이 대부분이다. 어쨋든 루이 15세 치세 (1715-1774)와 거의 겹치게 된다.
로코코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조용하고 관능적인 우아함에 있다. 강요하는 듯한 것, 과장된 것, 힘찬 느낌과 양감을 과시하는 것은 모두가 품위가 없다고 해서 배척되었다.
##########29*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라는 순서로 등장한 건축양식이 모두 교회건축으로부터 비롯된 것에 반해 로코코는 귀족이나 부유한 시민의 저택, 왕후의 궁전 건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기독교가 유럽사회에서 주역을 맡고 있던 시대는 이젠 끝난 것이다.

적은 인원으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살롱
로코코식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잇는 것은 건축 내부의 마무리 방법이다. 먼저 방의 사이즈가 일반적으로 작아졌다. 위압적인 바로크식의 장대함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비교적 적은 인원의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기지에 넘친 대화를 즐기는 살롱이 왕후 귀족의 사교생활에서 중심이 된 것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작지만 친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왕후의 궁전이라면 넓은 방에 높다란 천장이라는 것이 상례였으나 차츰 보통 저택과 같은 느낌으로 가까워져서 천장의 높이도 낮아졌다. 쓸데없이 높은 천장은 차분한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둥, 대들보, 문틀, 창틀을 없앤다
모두 "모서리가 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 로코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기둥, 대들보, 문틀, 창틀이 삐쳐 나오는 것을 의식적으로 없애고 방안에서 보면 주위의 벽을 모두 평평한 평면으로 마무리하였다. 기둥, 대들보, 문틀, 창틀은 건축구조에서 꼭 필요한 것이므로 벽이나 천장에 메워 넣어 눈에 잘 띄지 않게 했다.
그리스 건축에서는 열주와 대들보, 로마 건축에서는 열주와 아치와 벽체가 자아내는 힘찬 구성감이 건축에서 중심이 되었다. 여기서 유럽의 건축은 그 전통을 계속 계승해온 셈이지만 로코코가 추구한 건축의 미의식은 실로 180도의 전환이었다.
로코코식의궁 전을 구경할 때 자세히 보면 방과 방을 막고 있는 벽이 너무 두텁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앞에서 든 "메워넣기의 기법"을 쓴 결과로 그만큼 방이 좁아진다. 작은 집안의 공간을 가능한 살리려고 애쓴 것을 볼 때 어느 면에서는 사치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이러한 불합리와 사치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일부 특권 계급일 뿐이었다.

건물 외형에는 투드러진 특징이 없다
로코코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외형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과거의 비로크식의 요란스러움을 없애고 경묘하고 우아한 느낌을 내게끔 신경을 썼는데, 한 눈에 "이것이 로코코식이다" 라고 할 만한 두드러진 특징을 건물의 외형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그들이 정성을 들인 것은 건축 내부의 설계였으며 건축의 후원자였던 왕후 귀족의 관심도 전적으로 그 방면에 쏟아졌다.

그롯토에 기원을 둔 로카이유의 모양
로코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내부의 벽면이나 문장식에 로카이유 모양의 장식이 애용되었다는 점이다. 로카이유 (rocaille)란 프랑스어로 작은 돌, 자갈이라는 뜻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왕후의 정원에 그롯토를 만드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로카이유란 그롯토의 내장에 자주 쓰였던 자갈이나 조개껍질을 뜻한다. 그롯토 (frotto)는 이탈리아어로 동굴이란 뜻이다. 그러나 정원 관계의 용어에서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내지는 동굴 같은 방을 가리키며 그 내부를 작은 돌이나 조개껍질로 굳혀서 마치 천연의 동굴, 특히 바닷속의 동굴 같은 느낌을 냈던 것이다.
그롯토에는 대개 샘을 설계하고 해신, 해마, 님프, 돌고래, 어패류 등 물과 관계가 깊은 조각을 설치했다. 그리고 가끔 기괴한 취미를 발휘했는데 원래는 "그롯토와 같은"이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 그로테스크 (grotesque)가 오늘날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로카이유를 애용했던 것에서 로코코라는 이름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로카이유는 그롯토에서 벗어나 실내의 벽면 장식에도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롯토와는 달리 진짜 조개껍질을 벽면에 박아 넣은 것이 아니라 조개껍질과 해초를 뒤섞어 놓은 듯한 환상적인 모양을 벽에 시공했다. 이것이 로카이유 무늬이다.
로카이유도 대체로 그 어원인 자갈은 모습을 감추고 전적으로 조개껍질도 아니고 또 일정하게 정해진 것도 아닌 듯한 불규칙한 곡선이 많은 무늬를 애용했다.
로코코의 건축가들은 로카이유 무늬의 경묘함과 우아함에도 주목하고 벽이나 문의 장식에는 전적으로 로카이유를 사용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벽이나 문을 장식할 때 로카이유가 되어 있으면 그 방은 로코코식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만큼 철저하게 로카이유를 좋아했다.
로코코라는 양식명은 로카이유에서 유래한다. 그 무늬도 가벼운 느낌을 내기 위해 일부러 좌우대칭을 피하고 선은 되도록 가늘게 했으며 밝은 색 벽면에 황금빛의 로카이유를 우아하게 벽면에 떠오르게 했다.

참고 사이트: http://dragon.seowon.ac.kr/~jeronimo/landeskunde/europe.html